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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2017년 1월호][나의 하느님 공부]40년 만의 기도_공지영
제목 [성서와함께 2017년 1월호][나의 하느님 공부]40년 만의 기도_공지영
작성자 성서와함께 (ip:)
  • 작성일 2016-12-20 17:50:54
  • 추천 3 추천 하기
  • 조회수 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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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2017년 1월호][나의 하느님 공부]40년 만의 기도_공지영



나의 하느님 공부



나는 어머니에게 여러 번 성당에 함께 나가자고 권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는 “모두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 하고 말을 막으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조르자 이런 말씀을 하시긴 했다.


“나도 소녀 시절에 너처럼 새벽 미사도 나갔어. 그때는 새벽이면 서울에 눈이 발목보다 높이 쌓였단다. 집에서 나와 성당까지 그 깜깜한 새벽에 눈길을 이십 분쯤 걸어야 했는데 한 발을 디디면 여학생 구둣발 위로 눈이 덮였지. 그때는 부츠도 털신도 없던 때였으니까 성당에 도착했을 때는 눈 때문에 발이 꽁꽁 얼어 버리곤 했단다. 성당 안도 춥기는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그때 나는 말했어. 이 발걸음, 이 발 시림 하나하나 다 하느님당신을 위해 봉헌한다고.”


그러고는, 성직자들의 추문과 부패를 보고 성당을 떠났으니 더는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막연하게 그때 나는 소녀 적 어머니의 모습과 시린 발을 생각했고 내가 괜히 성당에 간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긴 한 것 같다. 하지만 그 후로 어머니는 내가 성당에 가자하면 무섭게 화를 내셨고 나는 혼자 방 안에 들어가 기도하며 훌쩍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세월이 많이 많이 흐르고 나도 중년이 되었다. 이제는 언니까지 나서서 어머니를 설득하나 어머니는 여전히 요지부동이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파티마 순례를 갔다가 예쁜 성모상을 발견했다. 나는 파티마의 성모님께 우리 어머니의 회심에 대해 간절히 부탁하고 어여쁜 성모상을 하나 샀다. 그러곤 돌아와 어머니 댁으로 갔다.


“그게 뭐냐?”


엄마가 물으시길래 나는 포장을 풀었다. “엄마, 기도하지 않아도 좋으니 이거 제발 그냥 여기에 세워만 놔둬 줘. 응?”

 

나는 성모상을 어머니 댁 입구 콘솔 위에 세워 놓았다. 뜻밖에도 어머니는 성모상 앞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다. 나로서도 당황스러웠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아무리 그래도 어찌 이 이름을 잊겠니?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은 없다.”


역시 파티마 성모님 효험(?)이 대단하구나 싶어 흐뭇했다. 손에다 성모상이 든 가방을 들고 행여 깨질까 애지중지 버스를 갈아타고 비행기를 타고 온 나 자신이 흐뭇하기도 했던 거였다. 그런데 일주일 후 내가 어머니 집을 방문하니 성모상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 성모상은?”


내가 묻자 어머니가 머뭇거리셨다. 그러고는 침대 밑에서 보자기에 꽁꽁 싼 성모상을 꺼내 내 쪽으로 밀었다.


“미안하다, 이게 여기 온 이후로 밤마다 악몽을 꾸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보자기에 싸서 이 밑에 넣으니 그때부터 잠이 편안해졌다. 미안하지만 도로 가져가거라.”


내가 어마 무시하게 화를 낸 것은 더 말하지 않겠다.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아느냐’부터 시작해서 ‘내가 이걸 얼마나 힘들게 날랐는데’를 거쳐 ‘성모상이 왔다고 꿈이 이상해지면 마귀도 하느님도 계시는 증거가 아니냐’까지…. 그리고 지친 나는 성모상을 가지고 오며 하느님께 말씀드렸다.

“하느님 알아서 하세요. 당신 손해죠, 뭐. 난 이제 엄마 기도 더는 안 할 거에요!”


그리고 또 시간은 갔다. 나는 아주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모든 어려움이 그렇듯 고통은 나 자신을 지극히 이기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에 사는 언니가 전화했다.


“너 엄마 성당 나가는 거 알아? 벌써 한 달 정도 됐어. 내일 아버지 영세, 엄마 영성체 그리고 두 분 관면 혼배하신대. 정말 감사하다. 너도 그동안 기도하느라 애썼다.”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다. 60년 만의 회심이었다. 내가 꽃다발을 사서 뛰어가니 믿을 수 없게 어머니와 아버지가 십자가 아래 나란히 서 계셨다. 이런 날이 오는구나. 하지만 나는 기도하지 않았었는데 신기했다. 어머니의 얼굴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본 그 어떤 모습보다 평화롭고 예뻤다. 어떻게 된 거야 묻자 어머니가 대답하셨다.


“모르겠어. 그냥 이젠 나가야겠다 싶었어.” 이야기하는 엄마는 마법에서 풀려난 개구리 왕자 같았다.


그해 겨울 눈이 많이 내렸다. 운전하고 있는데 어머니의 전화가 울렸다. 나는 전화를 받고는 대뜸 “엄마, 요새 눈 많이 쌓여서 노인들 골절사고 많으니 절대 집에만 계셔요” 했다. 어머니는 내 말을 듣자마자 “내가 바로 그 이야기하려고 걸었어” 하는 거다.


“며칠 전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 그만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는 그 와중에 보니까 엉덩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고, 골반이 바수어지겠다 했는데 그 순간 누가 내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넘어지는 나를 꽉 잡았어. 나는 가볍게 미끄러졌을뿐 한 군데도 다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누구한테 하는 게 쑥스러워서 못했는데 너는 이해하겠지 싶어 전화를 걸었단다.”


“그럼 엄마, 나는 이해하지. 예수님께서 우리를 실제로 붙드신다는 것을 나는 알지. 아, 엄마 정말 잘됐고 감사하다.”


전화를 끊는데 코가 시큰하면서 다시 눈물이 흘렀다. 드디어 이런 날이 오는구나,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엄마와 내가 예수님 이야기를 하는구나,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일 저녁 성모상 앞에서 손을 붙들고 묵주 기도를 5단씩 함께 바치시는구나.


그때 머릿속으로 소녀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엄마, 성당가자. 엄마, 성당 가자” 조르던 나를 혼내는 엄마에게 물러나 끽끽 울며 일기를 쓰던 내가 떠올랐다.


“하느님, 엄마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엄마를 당신께서 불러 주세요. 아버지!! 시린 발등 위로 덮이는 눈을, 그 발걸음 하나를 당신께 봉헌하던 소녀를 잊지 말아 주세요.”


그 기도는 40년 전에 내가 드린 것이었다. 그 구절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세세하게 내게 떠올라 왔다. 쿵 내려앉는 가슴 위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마리아야, 너는 잊었지? 나는 잊지 않았다.”


얼마 전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최근에 세례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 무슨 일이 있었니?” 묻자 친구가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그냥 어느 날 아침에 앉아 있는데 이제 고만 성당에 나가자 싶었어.” 듣던 내가 물었다.


“너희 엄마 신심 깊으시지?” 친구가 대답했다. “어떻게 알았어? 새벽마다 날 위해 기도하셨지.”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래 우리는 우리 기도를 잊어도 하느님은 안 잊으셔. 40년이 지나도 아마도 백 년이 지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




공지영 작가는 <창작과 비평> 가을호(1988)에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선한 것들이 결국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그런 믿음으로 계속 글을 쓰고 있으며, 저서로 《봉순이 언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의자놀이》, 《시인의 밥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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