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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2017년 3월호][오늘, 다시 만나는 진복팔단]아버지도 하느님도 모두 같이 애절하다_이근상
제목 [성서와함께 2017년 3월호][오늘, 다시 만나는 진복팔단]아버지도 하느님도 모두 같이 애절하다_이근상
작성자 성서와함께 (ip:)
  • 작성일 2017-02-22 13: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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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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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2017년 3월호][오늘, 다시 만나는 진복팔단]아버지도 하느님도 모두 같이 애절하다_이근상



오늘, 다시 만나는 진복팔단




아버지도 하느님도


모두 같이 애절하다


이근상 시몬




아버지가 중풍을 맞으신 건 올 1월 1일 저녁 늦은 밤이었다. 다음날 응급실에서 뵌 아버지는 날 알아보는 것도 같고, 못 알아보는 것도 같았다. 아버지는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너덧 개의 링거줄을 타고 약들이 아버지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약과 음식을 넣는 줄이 코로 들어가고 있었고, 줄을 잡아 빼려는 아버지의 두 손은 침상에 묶여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장면이었지만, 응급실에서는 내게 어떤 감정도 올라오지 않았다. 그저 멍했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서 사흘을 보낸 뒤, 병실로 옮겨졌다. 그날 밤, 아버지 곁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나는 아버지가 눈을 뜬 채 꾸는 꿈들을 신음으로, 비명으로 들었다. 가래를 뱉어 내시는 선명한 소리 외에 모든 소리는 뜻을 알 수 없이 뭉개졌다. 여전히 콧줄이, 여전히 손이 묶여 있었다.


뇌졸중이 더 진전될 위험이 있는 급성기의 두 주는 원래 이런 거라고 했다. 선교사로 해외에 나갔다가 5년 만에 돌아와 가족들과 해후의 기쁨을 나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곧이어 닥친 난감함이었다.


사람 참 비슷하다. 아버지가 풍에 맞아 쓰러지시니 첫 번째 어려움은 자책이었다. 뭘 잘못해서 벌을 주시는 걸까? 내가 선교지에서 돌아오자마자 그렇게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풍을 맞았으니, 내 탓인가? 다른 이들이 이런 식으로 고통을 하느님의 벌로 연결할 때마다, 나는 미친 소리라고 했다. 하느님을 옹졸한 소인배로 만들어 버리는 신성모독이라고….


그렇지만, 막상 이런 일이 닥치니 나도 그들과 똑같이, 밑도 끝도 없이 두리번거리게 된다. 무슨 이유든 찾아서, 그것으로라도 이 난감한 사태를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이해하면, 그렇게 사태를 손에 쥐면, 그래도 견디기 쉬울 거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 남 탓보다 손쉬운 건 내 탓이다.


나의 부족함은 언제나 내 주머니에 가득한 것이니 꺼내 놓기도, 손으로 만지기도 더 쉽다. 그래서인가,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그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머릿속 이성의 단단한 콘크리트 벽을 뚫고, 잡초처럼, 질기게 반복되어 마음 한편에서 등장했다. 아버지를 내 몫의 벌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 오만함이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모든 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기도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일으켜 달라 기도할 수는 없었다.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필요하지만, 내가 그렇게 기도한다면 그건 엄살이거나 거짓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펼치신 그 많은 기적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만나지 못한, 그때 그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이라고, 이제 당신이 주님임을 알게 해 주셨으니, 제게는 오직 하나의 은총, 더 깊은 믿음만이 필요하다고 고백하던 날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제 와 그걸 물릴 수도 없고, 물리고 싶지도 않은데…. 그런데 나는 이 절박한 순간 무엇을 어떻게 고백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기적이 필요치 않노라 고백했고, 더 이상 당신께 헛된 징표를 청하지 않겠노라 고백했는데, 그래서 나는 그날 마음이 가난한 이의 행복(마태 5,3)을 만났노라 소리쳤는데, 그건 이렇게 어쩔 줄 모르겠는 순간이 닥친 다음에야 가당한 고백이었다는 회한이 밀려왔다.


당신께 뭔가를 청하고 싶으나, 뭉친 마음은 말이 되질 못했다…. 슬픔은 근처에 있는 모든 감정을 다 잡아당겨, 아래로, 아래로 미끄러져 떨어졌다. 무엇을 기도해야 하느냐고, 가래를 뱉어 내는 아버지의 가슴을 토닥이며 나는 물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없을 때였다. 자정을 막 넘길 무렵, 사지가 묶여 정신이 또렷하지 못한 아버지가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으나, 그건 분명 숫자였다. 하나 둘 셋 넷 … 스물둘, 그리고 숫자는 순서를 지키지 못하고, 서른에서 마흔으로 건너뛰곤 하였다.


아버지의 입에서 숫자들이 계속 나왔다. 그리고 침상에 묶인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집게, 중지, 약지 손가락으로 숫자에 맞추어 흔들거리며 짚어 나갔다. 아버지는 묶인 손으로 신음 같은 묵주기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모송을 말로 또렷하게 바칠 수 있는 아버지의 뇌는 이미 피떡이 막아 버렸으나, 성모송을 하고픈 아버지의 마음만은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의 의미 없는 숫자의 반복에 옆 침상의 아저씨가 뒤척이며 불편해하였다. 성모송이 숫자가 되어 더 단순해졌지만, 그것은 알아들을 수 없는 신음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중이었다. 나는 눈물이 났다.


동방박사 셋은 별을 찾아 떠났고 결국 가장 보드라운 하느님을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걸은 길은 낮이 아니라 뭘 알아볼 수 없는 밤이었다. 그들의 밤에는 날마다 수많은 별이 떠올랐으나, 그들은 오직 한 별에만 희망을 두었다고 한다(마태 2,2).


수많은 별 중에 한 별이라니, 그것은 무모한 시도였다. 그 우직한 이들이 떠올랐다. 아버지도 이제 아버지만 볼 수 있는 한 별을 찾아 희망을 두고 걸어야 하는 순례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아직 너무나 많은 별이 보이기에 아버지를 이끌어 줄 초라한 별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지만, 모든 부서지고 꺾인(시편 51,19) 이들의 마음에만 떠오르는 그 별을 이제 아버지도 볼 수 있으리라 짐작했다.


마음이 가난한 이에게만 보이는, 그 가난한 별이, 이제 아버지의 생에 떠오른 것이다. 세상의 귀에는 숫자여서 어이가 없겠지만, 아버지에게는 절실한 성모송 같은 별이 뜬 것이다. 아버지는 이제 잘 보이지 않는 밤길을 아버지의 별과 함께 걸어갈 것이다.


내일 무엇이 주어질지 알 수 없다. 지혜로운 자 셋이 내일을 모른 채 자기들의 별을 보고 떠났다고 하니, 이제 아버지 역시 삶의 현명함을 맛볼 차례가 된 것이다. 자기가 다 부서진 뒤에야 별을 볼 수 있다니 슬프지만, 그 별은 그렇게 헛별을 쫓을 힘이 다 빠진 뒤에야 만나는 가난한 별이기에 슬픔은 숙명이리라. 하지만 그렇게 가다보면 주님이 계신 곳, 바로 그 하느님의 나라에 다다른다니 슬프기만 한 일도 아니다.


인간이 당신 뜻을 알 수 없으나, 우린 애절함이 있다. 당신께서 업신여기지 않으실(시편 51,19) 터이니, 당신의 자비에 희망을 두는 우리는 애절하다. 우리도, 그리고 주님도 마음이 가난하다고 나는 믿는다. 사랑하면 마음을 닮는 것이니. 같이 두들겨 맞는 것이니, 당신도 우리 모두와 같이 애절할 터, 그렇게 하늘나라는 당신과 우리가 함께 차지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이근상 신부는 예수회 소속으로 현재 김포 통진 바우네집에 거주하며 이주민 노동자와 그 가족을 위한 공동체인 ‘이웃살이’(Yiutsari)를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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