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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2017년 5월호][노년기 영성을 말하다]연령차별주의를 넘어_김효성
제목 [성서와함께 2017년 5월호][노년기 영성을 말하다]연령차별주의를 넘어_김효성
작성자 성서와함께 (ip:)
  • 작성일 2017-04-18 17: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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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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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2017년 5월호][노년기 영성을 말하다]연령차별주의를 넘어_김효성




노년기 영성을 말하다





연령차별주의를 넘어




김효성



시골서 자란 적 없던 나는 어릴 때, 빨간 고추와 파란 고추는 각각 다른 나무에서 달리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밭에 심은 고추 모종이 자라 파란 고추가 열리고 점점 빨간색으로 익어 가면, 그것을 따 말려서 만든 고춧가루로 김치를 담근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아이, 어른, 노인’도 원래 각각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시간이나 변화의 개념이 없던 내게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고정체였던 것이다.




어릴 적 품었던 이 생각이 최근에 떠올랐다. 며칠 전 대학로에 가려고 용산에서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데, 서울역쯤 지났을까? 젊은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에 집중이 안 돼 아예 이야기에 귀를 모았다.


갓 한국 체류를 시작한 20대 영어권 여성들이었다. 신기하게 여겨지는 한국 생활, 생일에 엄마에게 받은 카톡 얘기로 깔깔거렸다. 젊은 생기를 내뿜던 그들이 종로에서 내리자, 버스는 조용해졌고 나는 다시 책을 읽었다.


이어 안국동에 이르니, 노인 여럿이 우르르 올라탔고, 차 안이 소란해졌다. 70대 중반 분들이 이름까지 불러대며 자리에 앉아, 즐거운 모임 뒤 여흥으로 얘기꽃을 피웠다. 나는 아예 책을 접고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올해는 꽃구경 갈 생각들 안 하나 봐.” “다리가 아픈지들, 오래 걷기 싫다지 뭐야.”“영관이, 걔는 왜 일찍 갔대” “마누라가 중풍이라잖아.”“녀석, 고생하겠네.” 버스가 창덕궁을 지나니, “니들 생각나? 언제적이냐, 여기서 늦게까지 놀다들 갔잖아, 그날 엄마한테 꽤 혼났는데.” 예와 오늘을 넘나드는 얘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버스 안에 약주 냄새까지 풍겼지만, 싫지 않았다.


대학로에서 내려 걸으면서, 어릴 때 생각했던 파란 고추, 빨간 고추가 떠올라 혼자 피식 웃었다. 먼저 내렸던 젊은이들의 생동감과는 다르면서도, 왠지 비슷한 무엇이 젊은 노인들에게서 살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봄꽃을 구경하고픈 마음과 노약해진 다리, 노년의 마음속에 아직도 뛰노는 개구쟁이 소년, 친구의 가족을 염려하는 오랜 술맛 같은 우정. 이런 것들을 편히 듣는 나도 어느덧 나이가 들었나 보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어려서부터 ‘되어 가는 사람들’인데, 이를 쉽게 잊거나 착각한다. 인생에서 가장 힘이 왕성한 시기에 이른 성인은 종종 어린이를 ‘아직 덜 된 사람’으로 여겨 무시하거나 노인을 ‘이미 다 산 사람’이라며 귀찮게 여기고, 자신은 ‘이제 다 된 사람’이라며 배우지 않는다.


심하면 자기 잣대로 어린이나 노인의 만족도와 행복도를 정해 주면서, 남의 자율성을 지배하기도 한다. 건강이든, 용돈이든, 일이든, 정서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 정도면 됐지, 그 양반 뭘 더 바라셔! 다 사셨는데”라고 내뱉는다(나도 부모님이 80-90세 넘게 살아 계실 때, 마음 한쪽으로는 그렇게 여겼음을 고백한다).


얼마나 일방적인 잣대였던가! 행복은 각자의 자리에서 알아차리는 것인데,개인의 행복에서까지 노인들을 연령차별주의로 대하지 않았나?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 학력차별, 지역차별, 직업차별 등을 극복하자는 소리가 웬만큼 들리는데, 실상 연령차별을 넘기 위한 과제도 만만치 않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수도자들의 교육과 피정을 동반하고 있는데, 30-80대의 다양한 수도자들의 내면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나이에도 사람들의 마음은 다똑같구나!’ 하는 점을 발견했다. 누구라도 ‘엄마~’ 하면 그립고, 먼저 간 가족을 떠올리면 슬퍼지며, 저마다‘행복하고 싶다’는 바람을 맘속에 품고 있다. 쉬운 것을 이제 알게 되다니! 부끄럽지만, 예전에는 다 큰 어른이 엄마를 보고 싶어할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자기보다 훨씬 젊은 나를 붙들고 ‘엄마가 그립다’며 우시는 수녀님, 나이가 꽤 드셨어도 부모님을 떠올리며 눈물짓는 수사님을 뵈었다. 반면, 어린 시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했던 일들’을 회상하며, 옛 기억 속 대견한 아이를 새로 만나는 감동도 자주 접한다.


나이가 어떻든, 사람은 누구나 어떤 시기에서라도 온전한 행복을 그리며, 또 채워지지 않은 소망엔 늘 아쉬움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연령 차이를 넘어 각자의 행복을 존중할 수 있을까?


눈이 약간 열리게 된 체험은 80-90대 수녀님들과 살 때, 가까운 지역 40·50·60대 수녀님들이 자주 와서 6개 국적의 7명이 함께했던 공동체 경험이다. 외국어로 소통하는 고생이 컸지만, ‘차이와 차별은 다름’을 뼛속 깊이 배웠다. 함께 살면서, 각자의 다름과 고유함(나이, 음식, 언어, 습관, 성격 등)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풍요로움을 배웠다.




82세 실라 수녀님과 91세 피티 수녀님은 노쇠한 몸으로도 요리를 즐겨 하셨고, 좀 더 젊은 우리는 그분들의 자유와 실수(여러 일에 너무도 잦은), 행복감을 존중하며 편안했다. 옆집에서는 100세 로레트 수녀님을 정기적으로 영적 동반하는 50세 리즈 수녀님이 참 놀라웠다. 백세 노인까지도 개별 영적 동반을 해 드리다니!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늙는다. 하지만 젊고 늙음은 숫자상의 시간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 새로움과 낡음을 어떻게 경험하는가에도 달린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현실을 새롭게 경험하는 제자들처럼(“그들의 눈이 열려” 루카 24,31) 어느 날 내일상이 주님 때문에 새롭게 보인다면, 그리스도의 영원한 젊음이 내 삶에 들어와 사는 것 아닐까(“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주님의 영원한 젊음은 모든 연령차별을 넘어설 희망을 우리에게 가득 안겨 주신다.




김효성 수녀는 성심수녀회 소속으로 캐나다 몬트리올의 ‘통합적 인간양성 교육원(IFHIM)’에서 심리재교육학을 공부했다. 현재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장상연합회 ‘양성교육원’에서 남녀수도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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