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기사 게시판

뒤로가기
제목

[성서와함께 2017년 5월호][나의 하느님 공부]기도_공지영

작성자 성서와함께(ip:)

작성일 2017-04-18 16:32:58

조회 72

평점 0점  

추천 0 추천하기

내용


[성서와함께 2017년 5월호][나의 하느님 공부]기도_공지영



나의 하느님 공부




기도




공지영 마리아




《수도원 기행2》서문에도 쓴 적이 있지만, 결국 나의 회심도 누군가의 기도로 이루어졌다. 내게 있어 그 사람은 언니였는데, 농담 삼아 말하지만 언니가 “제발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며 나를 따라다닌 그 2년이 없었다면 나는 기필코 2년 먼저 하느님께로 돌아갔을지도 모르겠다.




지긋지긋한 선교사 같던 언니가 어느 날엔가 나를 만나서도 더 이상 “하느님” 소리를 하지 않고 대신 나직하게 “괜찮아, 널 위해 기도하고 있어”라고 한 말이 결국은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나는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너를 위해 기도한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가끔 내게는 자신의 끔찍한 처지를 호소하며 죽고 싶다는 편지들이 온다. 내가 읽어 봐도 죽고 싶다 싶게 상황들은 심각하다.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의 호소가 애처로워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정말이지 없다.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편지에 답하곤 했다.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마 답장도 오늘 이후로는 자주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한 가지는 약속할게요. 오늘부터 제가 매일 아침 촛불을 켜고 기도할 때 우리 애들 뒤에 바로 당신 이름을 넣겠습니다. 당신이 어느 날 문득 다시 내게 편지를 써서, ‘선생님 저 괜찮아요, 행복해요!’ 할 때까지요. 대신 그런 날이 오면 꼭 답신해 주세요. 왜냐하면 실은 제가 부를 이름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언제나 내 상상 이상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며 떠오르는 그녀는 신자도 아니었다. 힘들었지만 나는 아침마다 약속대로 기도했다. 그녀는 결혼 상대도 아닌 이상한 남자에게 속박되어 재능도 힘도 다 잃고 죽음만 꿈꾸는 상태였다.


편지를 읽어 본 나는 충고하고 싶은 말이 넘쳐났지만, 고통을 겪은 이는 안다. 무엇이 옳은지 몰라서가 아니었다.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것인지 몰라서도 아니었다. 스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면 나에게 그리고 죽음에 그것을 호소하지 않았으리라. 이런 때 모든 충고는 비난보다 더 헛되다. 그래서 침묵을 택한 나에게 그녀는 가끔 메일을 보내왔다.


“선생님, 저 그 남자에게서 벗어났어요”, “선생님, 저 파리로 왔어요”, “선생님, 파리에서 성당에 들어가 보았어요”, “선생님, 저 파리에서 교리반에 등록했어요. 다음 달에 세례받아요. 기적처럼요.”


그리고 어느 날인가 드디어 편지가 왔다.


“선생님, 저 이제 괜찮아요. 아주 괜찮지는 않지만 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제 저 말고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렇게 여러 해를 지내다 보니 아침마다 우리 아이들 이름을 부르고 나서 부를 이름이 점점 더 늘어간다. 급한 순으로 하느님께 부탁을 드리는데 어떤 날은 막 빼먹기도 한다. 가끔은 A4용지에다 이름을 주르르 써서 하느님께 그냥 들어서 보여 드리고 싶기까지 하다.


그러다 어떤 날은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 싶었고, 다 외우기도 어렵고 성의도 없어 보여 힘이 쭉 빠졌다. 그런 날 있지 않은가, 왜. ‘정말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날 말이다.


그런데 그날 복음이 다섯 개의 빵과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그걸 물질적인 이야기로만 듣고 있었나 보다. 힘이 빠져 있던 내게 아이가 지닌 그 작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이야기(요한 6,1-15)는 큰 힘이 되었다.


빵을 수천 개로 늘려 주시는 예수님께서 내 다섯 가지 기도를 수천으로 늘려 주시는 것은 문제도 아니겠다 싶었다. 아직도 내게는 더 기도해도 되는 명단이 사천구백오십 개쯤 남아 있는 거니까. 그러니 이제는 부를 이름을 가끔 빼먹어도 별로 걱정하지 않는다. 이미 나는 주머니를 뒤집어 가진 것을 모두 그분께 보여 드렸으니까.


사람들이 묻는다.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는 것, 미사 드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의 선행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악은 저렇게 힘세고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 있는데”나는 대답한다.


“우리의 작은 기도, 작은 선행이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 저는 몰라요. 그러나 가끔 생각합니다. 만일 세상의 악의와 선의를 다 모아 달아 놓은 저울이 있고 그것이 지금 팽팽하다면, 티슈보다 가벼운 내 선의 하나가 그 저울을 선의 쪽으로 기울게 할 수 있어요. 


만일 한쪽에는 세상의 모든 악과 불행을 다 모아 놓고 다른 한쪽에는 세상 사람들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를 모아 놓은 저울이 있다면, 지금 그 추가 팽팽하다면 티슈 반쪽만큼 사소한 나의 기도가 그 추를 움직일 것이라고.


세상의 모든 악행을 한 추에 달고 세상의 모든 선행을 한 추에 단 저울이 하느님 앞에 놓여 있다면 오늘 전철역 앞에서 귀찮지만 하느님을 생각하며 노숙자에게서 사 준 <빅 이슈>(BIG ISSUE, 노숙자 자활지원을 위한 잡지) 한 부의 사소한 선행이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산다고.


기억하시는지.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의 재앙을. 밀려오는 거대한 쓰나미 앞에서 종이 모형처럼 쓰러지며 휩쓸려 버리던 건물과 자동차를. 그리고 사람들을. 그로부터 3-4일 후로 기억한다. 점심때 라디오 뉴스를 듣는데 ‘또 하나의 지진이 해저에서 일어났고 지금 그 쓰나미가 일본 열도 쪽을 향하고 있으며 오늘 저녁 6시쯤 일본 동해안에 다다를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나는 하느님을 불렀다. 기도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다만 감히 막 아 달라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온 종일 금식을 하며 기다렸다. 저녁 6시 뉴스를 듣는데 쓰나미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다. 7시에도 그랬다. 8시쯤 되었나? 다시 뉴스를 들었는데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오늘 일본 동해에서 발생했던 쓰나미는 일본 열도 쪽으로 오다 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소멸되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알 수 없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그건 기도, 온 세상 사람들이 그 뉴스를 듣고 드린 기도 때문이라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한 바람까지 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 뒤부터 나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기도하자고 말한다. 그리고 머뭇거리는 친구들에게 말한다. 큰 소리로 말이다.


“쓰나미까지도 멈출 수 있어. 쓰나미 알지? 그걸 멈추었다고. 기도가, 기도가 말이야!!”



공지영 작가는 <창작과 비평> 가을호(1988)에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선한 것들이 결국 우리를 살게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그런 믿음으로 계속 글을 쓰고 있으며, 저서로 《봉순이 언니》,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의자놀이》, 《시인의 밥상》 등이 있다.



첨부파일

비밀번호
수정

비밀번호 입력후 수정 혹은 삭제해주세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수정

이름

비밀번호

내용

/ byte

수정 취소

비밀번호

확인 취소

댓글 입력

이름

비밀번호

내용

/ byte

평점

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

댓글 입력

이름

비밀번호

내용

/ byte

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