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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2016년 9월호][말씀과 삶][성경 칼럼]개와 돼지의 세상을 이겨 낼_김경집
제목 [성서와함께 2016년 9월호][말씀과 삶][성경 칼럼]개와 돼지의 세상을 이겨 낼_김경집
작성자 성서와함께 (ip:)
  • 작성일 2016-08-25 09: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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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와함께 2016년 9월호][말씀과 삶][성경 칼럼]개와 돼지의 세상을 이겨 낼_김경집


성경 칼럼 -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개와 돼지의 세상을 이겨 낼



김경집 바오로




결국 판도라 항아리의 뚜껑이 열렸다. 자기들끼리 모여 있을 때 뒤로만 쉬쉬하던 말을 대놓고, 그것도 언론에 터뜨렸다. 그 민낯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다.


첫째, 너무나 당당히 99:1 프레임을 토설했다. 자연계도 그렇고 우리의 이전 세계도 80:20의 프레임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어도 열심히 노력하면(물론 대부분 공부를 통해서였지만) 성공할 수 있었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 나는’ 시절이었다. 확률은 25%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머리가 좋고 열심히 노력해도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 99에서 1로 진입하는 것은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이다. 이제는 개천에서 ‘욕’ 나오는 시대다.


21세기 천민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은 돈이 권력이고 능력이며 호패인 세상이다. 새로운 신분이 나타났고 각각 명패를 내걸었다. 이른바 수저 계급론이다. 흙수저는 평생 금수저 세상에 얼씬도 할 수 없는 구조로 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구조를 더욱 강고히 하기 위해 더 강력한 카르텔로 굳어지고 있다.


둘째, 1% 혹은 1%에 속한다고 착각하는 마름꾼들이 99%의 민중을 노골적으로 개와 돼지로 부르기 시작했다. 개천에서 났지만, 이제는 그 개천을 지워 내고 싶어 하는 자들의 천박한 욕망이 그렇게 만들었다. 정부의, 그것도 교육을 맡은 고위관료의 입에서조차 여론의 마당에 대고 ‘개, 돼지’ 운운하며 신분제가 굳어져야 한다는 망발을 마음껏 내뱉었다. 그것은 단순한 음주 상태의 말실수도, 한 개인의 일탈도 아니다. 이미 그런 시선을 공유했고 자기네들끼리는 공감하며 유통하던 언어가 저잣거리까지 흘러든 것뿐이다. 똥통이 넘쳐 길에 흐르게 된 꼴과 다름 아니다. 사회가, 세상이 이런 악취로 가득하다.


특정한 세력을 싸잡아 비난하는 것도, 침소봉대하여 일반화하는 것도 위험하다. 그렇지 않은 이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다수가 소수를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비난이 전적으로 악한 소수의 몫인지는 자신에게 먼저 물어볼 일이다.


아브라함은 데리고 살던 롯을 분가시켰다. 함께 살기에는 땅이 좁아서 가축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잦자 땅을 나눴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쪽을 택한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다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 소돔과 고모라는 이미 악행이 만연했다. 다른 종족들과 다툼이 잦았던 두 성읍은 임금이 달아날 지경에 이르렀고 적군들이 소돔에 있던 롯을 잡아갔다.


이 소식에 아브라함은 종들을 데리고 적과 싸워 조카와 그의 재산을 되찾았다. 롯은 다시 소돔에 살게 되었다. 그런데 하느님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처벌하려 하자 아브라함은 조카가 걸렸다. 그는 하느님께 매달렸다. 그곳에 의인이 쉰 명 있으면 용서해 달라고. 그런데 아무래도 그게 만만치 않을 것 같으니 계속해서 다섯 명씩 감해서 청원하고 마침내는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용서하겠다는 약속을 얻었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 그러나 소돔에 그런 의인이 없었다. 끝내 소돔은 파멸을 면하지 못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창세기 시대에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이 소돔과 고모라다. 온갖 악행이 득시글댄다. 강자는 힘으로 누르고 부자는 돈으로 조종하며 식자는 곡학아세를 일삼는다. 종교인들마저 세상에서 자신들의 몫을 차지하려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소돔과 고모라는 지배자들만 타락한 게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천사 둘이 롯의 집에 들었을 때 행패를 저지른 건 성읍의 사람들이었다. 그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겹친다. 불의를 비판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몫이지만 교회와 신자들의 의무는 특히나 더 크다.


어쩌면 지금 이 지경에서도 사회가 망하지 않고 벌 받지 않은 것은 열 명의 의인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의인 중에는 집, 학교, 교회에서 배운 대로 의롭게 사는 1%에 속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을 한꺼번에 매도할 일은 아니다.


또한, 자신이 - 1%에 속한다고 뻐기는 얼빠진 소수자들이 개와 돼지로 매도한 - 대다수에 속한다고 해서 면책되는 것도 아니다. 권력에 아부하고 부에 굴종하며 정의를 조롱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나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이다. 교회 또한 그러한 모습인 경우가 너무나 비일비재하다. 침묵하고 강자의 편에 서는 교회는 결코 열 명의 의인이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교회가 열 명의 의인인 것처럼 착각한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마태 3,7) 하고 질책하며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마태3,10)선언했다.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는 지금 교회와 신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는 데에 급급할 게 아니라 그 진노를 거둬들일 정의의 실천에 진력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교회와 신자의 몫이다.


개와 돼지로 낙인 찍히는 게 억울할 수 있지만, 진짜 개, 돼지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할 일이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지녀야 한다.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짠맛을 잃고 빛을 스스로 거두는 교회가 그  재앙의 징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김경집 님은 인문학자이자 작가이다. 25년 동안 배우고, 25년 동안 가르치고, 25년 동안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하려는 계획에 따라 지금은 자유롭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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