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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2016년 12월호][선교지에서 읽는 바오로 서간]원숭이와 함께 식탁에!_김영희
제목 [성서와함께 2016년 12월호][선교지에서 읽는 바오로 서간]원숭이와 함께 식탁에!_김영희
작성자 성서와함께 (ip:)
  • 작성일 2016-11-21 10: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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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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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함께 2016년 12월호][선교지에서 읽는 바오로 서간]원숭이와 함께 식탁에!_김영희




선교지에서 읽는 바오로 서간-스물세 번째 편지



원숭이와 함께 식탁에!




김영희 젬마루시



여러 해 전, 생 자비엘 학교(고다바리, 네팔)의 예수회 사제관 경당에서 있었던 원숭이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고다바리에 성당이 없어 신자들이 예수회 사제관 경당으로 미사를 왔습니다. 어느 날, 한 신자를 따라 원숭이 한 마리가 미사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미사 동안 원숭이는 그 신자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영성체 시간에 신자들이 움직이자 그도 따라 신부님 앞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신자들에게만 성체를 나눠 주시자 원숭이는 두리번거리다가 제대 위로 올라가 주수병에 남은 물을 홀짝 마시고 유유히 내려와 그 신자 옆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함께 돌아갔다고 합니다. 너무도 어이없는 일이었지만 신자들 누구도 그 원숭이를 쫓아내거나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미사를 마쳤다고 합니다.



수녀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6년 전 어느 여름, 날이 더워서 식당 문을 열어 놓은 채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후식으로 바나나를 막 먹으려고 하는데 마침 수녀원을 수리하던 아저씨가 저를 불렀습니다. 잠시 나와서 그분과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식당 안에서 “원숭이예요. 원숭이!” 하는 수녀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황급히 달려갔더니 놀랍게도 원숭이 한 마리가 제 의자에 앉아 여유만만하게 바나나를 벗겨 먹고 있었습니다.


먼저 식사를 끝낸 수녀님이 싱크대에서 자기 그릇을 씻고 있는 사이에 원숭이가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 수녀님이 식탁 위의 다른 접시들을 닦으려고 뒤돌아섰을 때, 원숭이 한 마리가 식탁에 떡하니 앉아 바나나를 먹고 있었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제가 식당 안에 들어갔을 때 원숭이는 이미 다 먹은 바나나 껍질을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유유히 식당을 나가 버렸습니다. 원숭이를 보고 몹시 놀란 수녀들을 바라보던 아저씨는 아무 일도 아닌 듯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좀 귀찮아지니까 문을 잘 닫아 놓으셔야 해요.” 지금 같았으면 얼른 스마트 폰으로 사진 찍어 놓았을 일입니다.


카트만두에는 스와얌부나트(Swayambhu-

nath) 같은 사원이나 길거리에 원숭이가 많습니다. 이들이 종종 과일이나 과자를 들고 가는 여행객들의 가방을 낚아채곤 해 여행객들을 놀라게 합니다. 그러나 직립한 원숭이의 형상에 붉은 얼굴을 한 ‘하누만’(Ha-numan) 신神을 자비로운 수호자로 숭배하는 네팔 힌두교도들은 원숭이들이 과일 가게에서 과일을 집어다가 먹어도 내쫓지 않습니다.


원숭이만이 아닙니다. 소, 개, 까마귀, 쥐, 뱀 등 살아 있는 동물들을 수호신으로 여기며 그들 모두 각각의 역할이 있다고 믿고 숭배합니다. 그래서 네팔에서는, 종족과 카스트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도 묘하게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듯이, 가축과 동물들도 –물론 같은 식탁에 앉는 것은 아니지만 - 사람들의 일상에 함께하며 더불어 살아갑니다. 종족과 카스트의 차이가 융합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 이것이 ‘다양성 안에 함께하는’ 네팔의 묘한 특성인 것 같습니다.


바오로는 확고한 율법적 사고에 따른 열광적인 바리사이로서 자신의 종교와 문화 안에 갇힌, 타협을 모르는 완고한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하느님과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완전히 변모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다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주어진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고, 이를 어떻게든 ‘모든 이’와 나누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에페 2,14.17).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


물론 바오로도 이 은총의 나눔을 어떻게 실현해 갈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다양한 민족과 문화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일치와 평화를 이루어 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단순한 일도 아닙니다. 바오로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과 맹렬히 논쟁했던 것도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문제였고(갈라 2,11-14), 그가 세운 이방인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난 문제들도 결국은 복음이 새롭고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구체화 될 수 있느냐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대화의 사람, 바오로는 민족주의자들이나 다른 전통 종교와 문화를 배경으로 한 다양한 사람들과 계속 만났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복음의 원칙에서는 후퇴를 모르는 전사처럼 확고하여 결코 양보하지 않았지만, 그것의 적용에서는 대단한 유연성과 개방성을 지닌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선교사였습니다.


바오로가 이처럼 창조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모든 이’를 한없이 존중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기도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힘 덕분이었습니다. 바오로는 30년 남짓 선교사, 교회 설립자로서 놀랍게 활동하면서도 관상적觀想的 정신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머문 기도하는 선교사였습니다(사도 9,12 에페 3,14-21 필리 1,4).


바오로는 ‘놀라우신 업적으로 우리를 경탄하게 하시며 그분의 신비로 끌어들이시고 변모시키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그리스도교적 관상’을 보여 줍니다(2코린 3,17-18 4,6). 이 안에서 그는 하느님께 한없이 감사와 기쁨, 찬양을 드리며 살았습니다(로마 15,11 1코린 6,20 2코린 4,15 에페 5,19 필리 1,3 4,6 콜로 3,16-17).


바오로는 하느님의 구원 능력과 자비를 베푸시는 방식이 인간의 논리를 무한히 초월함을 잘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전심전력으로 자기의 역량을 다 발휘하고는 ‘모든 것을 선으로 이루시는 하느님’(로마 8,28)께 깊은 예배의 자세로 모든 것을 봉헌했습니다(로마 11,35-36 15,16-17 에페 3,20-21).


다원적 가치가 지배하는 현대는 우리가 사는 사회와 시대에 열린 영성, 그야말로 ‘까치발을 딛고’ 우리 자신의 벽 너머를 바라보라고 재촉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소중히 간직한 채 모든 것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사랑, 변화를 위한 용기와 지혜를 지니고, ‘기본에 충실하면서 기본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사도의 마음으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복음의 축복을 나누라고.



김영희 수녀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서울관구 소속으로 네팔의 포카라 빈민가에서 어린이 공부방(St. Paul Happy Home 생 폴 해 피홈)과 방문 진료소(St. PaulMobile Clinic)에서 동료 수녀들과 일하고 있다. 《용서보다는 의화》라는 책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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